임업발전

청나라 점령시기 한인의 활동범위는 펀치후 일대에 한했지만 1899년 대만 총독부가 소이케 산바로 등을 보내어 쩌우족(鄒族) 원주민의 가이드를 받아 숲 상황을 조사했는데 수천 년 동안 도끼가 들어가지 않은 거대한 나무 숲을 만나 일본인들이 이를 「무진장」이라며 놀라워했다. 「무진장」이 발견된 후에 아리산의 우거진 숲은 곧 사용 가능한 자원으로 변했다. 이후 산림학 교수 히카리 히토시 등은 조사를 이어갔고 아리산 숲이 높은 경제 개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개발이 성공하면 이를 원주민지역 통치의 예로 활용할 수 있었으며 철도, 기계적인 방법으로 목재를 운송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총독부는 운송 노선을 평가하고 나무를 벌목하고 수확하며 가공하는 등의 관련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다양한 기술과 장비로 신비로운 안개 숲을 탐색하여 아리산 임업의 백년 역사가 시작되었다.

1914년 12월에는 자이 제재소가 완공되어 운영을 시작했다. 이 제재소는 약 390 개의 축구장 정도의 규모로, 당시 가장 큰 관영 목재 산업 지역이었다. 원구 내에는 미국, 독일 및 영국에서 유래된 선진 기술을 활용하고 전력을 이용하여 다양한 기계를 구동하며 운송, 톱질, 목재 건조 작업의 효율을 최대화했다. 당시에는 일본이 아리산 산림 산업의 잠재력에 대한 신뢰를 반영하는 엄청난 투자를 했는데 일본은 이를 대만 자원 개발의 지표적 성과 중 하나로 보았으며 「동양 제일」로 불렸다. 자이 제재소는 목재를 가공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산 위에서 운반되어 오는 다양한 원목을 보관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이는 아리산 산업 체인의 중요한 부분이자 대만 산림 산업 발전의 귀중한 문화 유산이다. 제재소 설립 이후 산 아래의 산업 체인 발전을 촉진하여 자이시의 베이먼 외곽에는 목재를 중심으로 한 임업취락이 형성되었다.

아리산 산림장은 장기간의 벌목으로 연간 벌목량이 점차 감소하면서 산업 자원 고갈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1963년에는 아리산 작업장이 직영 벌목을 중단하고, 저장소, 제재소 등의 시설이 차례로 철거되었다. 자이시의 목재 산업은 번창한 발전을 거듭해왔으나 벌목이 종료되면서 쇠퇴하는 운명에 직면하고 있다. 과거 도시 공간에서의 산업 발전의 영광은 여전히 자이시 옛세대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일제 시대부터 남겨져 있는 다양한 임업발전과 관련된 풍경은 최근 활성화와 재창조 방식을 통해 대중에게 임업취락의 역사를 재조명하게 만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토지 환경에 대한 적극적인 촉구로 인해, 정부는 1991년에 천연림 벌목을 금지하는 선언을 했으며, 산림 사업의 중심을 생태 보전으로 전환하여 산림이 숨을 쉬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국토 보안과 기후 변화 문제를 고려할 때, 무차별적인 벌목은 산업 발전과 탄소 흡수 효율에도 불리하므로, 계획적인 임야 조성과 벌목을 통해 산림 생태가 건강하게 순환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는 적절한 벌목, 생태 문화 관광, 산림을 파괴하지 않는 개발 등의 방법을 통해 대중이 산림을 보다 다양한 시각으로 인식하고 산림과의 균형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